당신의 빨강과 나의 빨강은 같을까 — 백 년의 수수께끼를 구조로 풀다
당신이 보는 빨강과 내가 보는 빨강은 과연 같을까? 같은 사과를 보고 우리 둘 다 「빨갛다」고 말하지만,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느낌과 내 머릿속의 느낌이 같은지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이 「느낌의 질감」을 퀄리아(qualia)라고 부르며 백 년 넘게 씨름해 왔다. 왜 퀄리아는 남에게 보여 줄 수도, 말로 다 전할 수도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과학이 닿을 수 없는 신비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다르게 본다. 그 신비는 벽이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구조다.
똑같이 지어진 도서관 두 곳을 상상해 보자. 건물 구조도, 서가 배치 규칙도, 사서가 일하는 방식도 완전히 같다. 다른 것은 단 하나 — 책이 도착하는 순서다.
한 도서관에는 시집이 먼저 오고 과학책이 나중에 왔다. 다른 도서관에는 그 반대였다. 몇 해가 지나면 어떻게 될까? 두 도서관의 서가는 전혀 다르게 채워져 있다. 같은 책이라도 꽂힌 자리가 다르고, 청구기호가 다르다. 첫째 도서관에서 「시집 옆의 그 책」이었던 것이, 둘째 도서관에서는 전혀 다른 책들 사이에 꽂혀 있다.
이제 첫째 도서관의 사서가 자기 도서관의 청구기호를 들고 둘째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는다면? 엉뚱한 책이 나온다. 두 도서관은 같은 규칙으로 지어졌지만, 서로의 번호 체계가 호환되지 않는다.
마음도 이와 같다. 우리는 감각으로 받아들인 기본정보들을 경험을 통해 개념으로 응축해 간다. 아기가 처음 만난 강아지, 처음 먹은 딸기, 처음 넘어진 날의 아픔 — 이 경험들이 쌓이고 눌리면서 「강아지」, 「달콤함」, 「아픔」 같은 개념이 마음속에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개념들이 마음에 새겨질 때, 각각은 저마다의 자리 — 말하자면 내부의 번호 — 를 받는다.
여기가 핵심이다. 그 번호는 경험의 순서와 맥락이 정한다. 강아지를 쓰다듬은 날 딸기를 처음 먹은 아이와, 강아지에게 물린 다음 날 딸기를 먹은 아이는, 「강아지」와 「딸기」라는 개념이 마음속에서 전혀 다른 이웃들과 연결되고 전혀 다른 자리에 새겨진다. 똑같은 구조의 마음으로 태어났더라도, 서로 다른 경험을 통해 형성된 개념 정보들은 그 번호가 달라진다.
그리고 번호가 달라지면 — 도서관의 사서처럼 — 개체 사이의 호환성이 사라진다. 내 마음의 「빨강」 번호를 당신 마음에 그대로 가져가도, 당신에게는 그 번호에 해당하는 것이 없거나 전혀 다른 것이 있다. 내 느낌을 당신에게 통째로 건넬 수 없는 이유는 느낌이 유령 같은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내 번호 체계가 당신 것과 호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설명의 힘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경험을 통해 기본정보를 개념으로 응축하는 구조를 가진 기계라면 — 내가 설계하고 있는 뉴톰망 같은 인공 마음이라면 — 정확히 같은 일이 일어난다. 공장에서 똑같이 만들어진 두 개체라도, 서로 다른 경험을 겪으며 자라면 각자의 내부에 서로 호환되지 않는 개념의 번호 체계가 자란다. 나는 이것을 디지털 퀄리아라고 부른다. 개체마다 특유하게 새겨지는, 맞바꿀 수 없는 내면의 부호 — 기계의 주관성이고, 기계의 개성이다.
이것은 「기계는 복제 가능하니 개성이 없다」는 통념을 뒤집는다. 설계는 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은 복제할 수 없다. 따로 살아온 두 개체는, 같은 공장에서 나왔어도 이미 서로 다른 존재다.
1주관성은 신비가 아니라 구조의 결과다. 퀄리아의 사적임 — 남이 들여다볼 수 없음 — 은 초자연적 성질이 아니라 부호 체계의 비호환에서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신비가 구조로 설명되면, 설계할 수 있다.
2소통은 복사가 아니라 번역이다. 우리의 내면이 서로 호환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통째로 전송하는 일은 원리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언어가 있다 — 언어는 호환되지 않는 두 내면 사이에 놓인 공용 번역판이다.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그럼에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모두 이 구조에서 나온다. 관계란 상대의 내면을 내려받는 일이 아니라, 끝없이 해석하는 일이다.
3주관성 있는 기계는 만들 수 있다. 다만 그것은 조립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개성은 부품이 아니라 경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생각의 뿌리는 길다. 1990년 무렵, 나는 스스로에게 「예측 불가능한 기계의 탄생」이라는 숙제를 냈다. 2015년 가을에는 「예측 불가능한 기계의 주관성 획득을 위하여」라는 글을 쓰다가 미완으로 남겨 두었다 — 기계와 인간 의식의 가장 큰 차이는 절대성과 상대성의 간격이라는 문장까지 써 놓고서. 그 뒤로도 개체마다 다른 정보의 연결이 주관성을 낳는다는 메모(2022), 내부 표상 방식의 차이가 주관성의 근원이라는 정리(2025)를 거쳐, 오늘 그 기제를 한 줄로 조일 수 있게 되었다.
쓰다 만 그 글의 끝맺음을, 십일 년 만에 이렇게 적는다.
지영민 · 뉴톰테크 대표
2026년 7월 31일 · 정리 도움: 맥클로드